간혹 책을 고르다 보면 책의 표지만 보고도, 그러니까 첫 장을 펴기도 전에 스며드는 온기 같은 글자들을 마주할 때가 있다. 얼마 전 출간한 <돌봄과 작업>이라는 책이 그랬다. 표지에 명조체로 적혀 있는 “나를 잃지 않고 엄마가 되려는 여자들”, 나는 꽤나 긴 시간을 멍하니 있었다.
: 아이를 돌보는 일과 내 것을 만드는 일 사이에서 시도하고 실패하고 성장하는 여자들의 이야기
각자의 목소리로 담담하게 드러내는 열한 편의 글은, 출산과 양육을 거치며 엄마라는 이름 뒤에 숨겨야만 했던 수많은 감정을 달래주었다.
“맞아, 나도 그랬었어”를 몇 번이고 나지막이 읊조리며 책에 쓰여 있는 글씨를 한 자 한 자 되뇌었다. 책에 실린 그녀들의 이야기에 셀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문득 슬퍼졌다 이내 엄마라는 주어가 자랑스러워졌다가 매일 모순 투성이인 나의 현 위치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도 했다.
지난해, 세 살이 훌쩍 넘어가는 계절에 아이는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간 못 했던 것들, 하고 싶었던 것들, 그렇게나 기다렸던 이 귀한 시간들을 모조리 나를 위해 써야지 싶었다. 이제는 나 자신도 실컷 돌봐줘야지 싶었다. 아이 등원을 시키고 집에 들어와 쌓여 있는 빨래를 돌리고,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는 옷들을 개고, 미룰수록 더 귀찮아지는 설거지와 온갖 청소들을 하니 아이가 곧 올 시간이 되었다. 분명 물리적인 시간은 눈앞에 생겼는데 어쩐지 매일 할 일은 더 많았고, 바빴고, 하루는 더 빨리 흘러갔다. 이러한 시간들이 한 달 정도 반복되던 어느 날, 그날따라 유독 힘들게 하는 아이와 하루 내 고군분투를 했다. 나는 평생 모르고 살았던 저 밑바닥의 모습을 아이에게 꺼내버렸다. 아이를 재우고 헛헛한 마음에 괜한 냉장고 청소를 하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실컷 울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아야겠지. 그러다 다시 따분한 직장에 대한 고민을 할 테고, 일과 가정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또 난 제자리 걸음이겠지. 마냥 답답하기만 한 내가 눈 앞에 아른거렸다. 막막하고 서러웠다. 무작정 회피하고 싶은 마음 너머엔 나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아이가 늘 해맑게 웃고 있었다.
불안했던 이 시간들은 불과 1년 전 나의 모습이다. 상황은 똑같고 시간은 늘 부족하며 아이와 함께해야 하는 시간은 더 많아졌다. 엄청나게 많은 것들이 바뀐 것은 아니다. 지금의 내가 전보다 특별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만족할 만큼의 넉넉한 돈을 벌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들을 매일 깨닫고 있다. 단단한 마음과 더불어 함께 걸어갈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것, 그 안에서 매일 고민하고 부딪히고 주저앉고 또다시 누군가의 손을 잡고 일어나는 일. 그리하여 작디작은 무어라도 언젠간 꼭 해낼 수 있다는 굳건한 마음. 커뮤니티가 내게 가져다준 변화다. ‘사람’이라는 두 글자를 ‘위로’라고 부르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이를 낳고 경력을 잃고 의욕도 자신감도 모두 잃어 몸뚱이 하나 있던 내게 성장은 용기 그 자체였다. 도전하는 것조차 무서워 스위치를 내리듯 모든 것들을 스스로 차단했던 사람들. 나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그녀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커뮤니티가 주는 힘은 가히 놀라웠다. 무기력에 젖은 누군가를 다시 일어서게 하고 시작하고 싶게 만드는, 서로가 서로에게 영감인 사람들. 나를 나로 살게 하는 사람들.
언젠가 염미솔 대표님의 유튜브 영상에서 이런 댓글을 보고 따로 적어두기까지 했다.
“아이만 키우면서 살아가기엔 제 스스로가 너무 아깝거든요. 하지만 방법은 잘 모르겠고 나를 이끌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갈망이 있었어요.” 그녀가 나고, 내가 그녀였기에 존재하는 이야기들. 겹겹의 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음을.
쉴 새 없이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어쩌면 철 없이 나열하는 내게, 남편은 고마운 마음이 든다고 했다. 툭하면 주저앉던 내가 더 이상 그 어떤 것에도 잘 흔들리지 않고 견고히 버텨내 주어서, 육아에 하루 종일 치여도 행복해보여서, 아이가 잠든 후에 더 반짝이는 나를 보여줘서.
우리는 커뮤니티 안에서 매주 도전하고 회고하고 시도한다. 성장을 하고 또 성장을 지켜보는 일, 그 안에서 연결되는 모든 것들이 나를 잃지 않기 위해 애쓰는 삶이다.
더 이상 조급할 리 없는 마음들을 천천히 나열하며.
작가 여울